문화일반

[소설 속 강원도]소설에 회화적 상상력 더해 인간 관계의 복잡성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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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이제하 ‘풀밭 위의 식사’

소설에 회화적 상상력 더해
인간 관계의 복잡성 보여줘

산간마을 이방인 목사와 가족들
마을공동체서 겪는 이야기 전개

◇에두아르 마네의 유화 작품 '풀밭 위의 식사'.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년)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풀밭 위의 식사(Le Dejeuner sur l’herbe). 이 작품에서 제목을 가져오고 등장(?)까지 시킨, 이제하의 동명 소설은 그가 가진 서양화가로서의 예술적 면모가 어떻게 소설 속에서 표출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풀밭 위의 식사’가 티치아노의 ‘전원음악회’나 라이몬디의 ‘파리스의 심판’ 등 거장이 남긴 작품에 대한 재해석이라면, 이제하는 이 회화 작품을 소설 속 서사구조 안에서 또다시 재해석하는 색다른 시도를 선보였다.

소설의 배경은 강원도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A리(里)다. 소설 속에서는 “태백선과 지그재그로 그것을 따라 올라가는 영월 쪽의 국도가 세 번짼가 네 번째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곳이다.

소설은 강원도의 한 산간마을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그의 가족이 마을공동체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큰 줄기로 하고 있다.

어느날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펼치고 그림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

아버지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림의 상징성에 대해 나름의 분석을 덧대서 말하지만, 가족들은 공감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느닷없이 남·북한의 분단 상황에 비유하며 그림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이해할 수 없다며 혼란스러워 한다. 이처럼 가족 내 의사소통에 있어서의 삐걱거림은 마을에서 겪게 될 갈등 상황을 예고하는 전조(前兆)와도 같은 것이었다.

산골마을에 스며든, 말 그대로 이방인 신분인 아버지는 그곳에서 겪은 갈등과 모순을 해결하고 화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힌트를 ‘풀밭 위의 식사’ 에서 발견해 낸다. 그리고 “그림의 무대가 바로 이 동네라면 어떨까”라는 독백처럼 현실에서 그림 속 화해의 상황을 재현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바로 피크닉 추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건 위대한 화해의 자리야...”라고 한 아버지의 기대처럼 모든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을까.

피크닉은 마을공동체의 화합을 위해 기획된 자리였지만, 실제로는 여러 갈등과 불화로 인해 계획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결국 또 다른 갈등과 반목을 잉태하는 사건으로 전락하고 만다.

마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최보살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리더십과 권위의 상징으로 군림하던 최보살이 목사(아버지)를 기존 질서를 흔드는 인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최보살의 집과 대비되는 아버지의 교회 역시 공동체의 중심지로서 거부되고 갈등의 장소가 돼 버린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설교 중 강단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은 그의 직업과 신앙에 대한 깊은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마을과 가족에게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가족과 공동체 내의 갈등, 개인의 신념과 집단의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과정을 통해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투명한 냇물이 조잘대며 흐르고 짙고 푸른 산과 수풀들이 뒤로 병풍을 둘렀다”는 것을 단서로 한다면 배경이 된 곳은 태백선과 국도 31호선이 포개지는 영월 석항천 인근 ‘연하리’ 정도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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