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법정칼럼] ‘기다림과 권리 불행사’ 사이에서

{wcms_writer_article}

이보라 춘천지방법원 판사

이보라 춘천지방법원 판사

“제가 최근 여러 가지 바쁜 사정으로 소장을 늦게 접수하긴 하였지만 저에게 돈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판단한 1심을 취소하여 주십시오.” 얼마 전 보았던 항소 이유서에 적혀 있던 말입니다. 위 항소 이유서를 작성한 원고는 2006년경 피고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피고가 돈을 갚지 않자 2011년경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원고가 첫 번째 판결에 의하여 확정된 채권의 소멸시효를 중단시키기 위하여 두 번째 소송을 제기한 2023년은 첫 번째 판결이 확정된 날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난 시점으로,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였습니다. 결국 위 사건은 소멸 시효기간의 경과가 임박하여 시효중단을 위하여 예외적으로 소의 이익이 있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각하 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 보호받지 못한다.” 학창 시절 법을 전공으로 하지 않은 학생들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던 말입니다.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이 자신의 저서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남긴 문구로, 주지하다시피 오랫동안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사람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법률용어인 ‘시효(時效)’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데, 종종 민사재판에서는 위와 같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여 소송에서 패소하는 경우가 발생하곤 합니다. 상대방의 형편이 어려워져 돈을 빌려주고도 변제받지 못하고 있지만, 차용증을 받아두었으니 차차 형편이 나아지면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턱대고 기다리기만 하다가 시효가 도과되어 영영 돈을 변제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소멸시효란 권리자가 그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기간 동안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상태 즉 ‘권리 불행사’의 상태가 계속된 경우 권리자의 권리를 소멸시키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처럼 권리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정 보장되지는 않기 때문에 채권의 소멸시효기간이 몇 년인지 확인한 후 해당 기간이 완성되기 전에 내 권리를 행사하여야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멸시효기간은 채권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민사채권의 경우 10년(민법 제162조 제1항), 상행위로 인하여 발생한 상사채권의 경우 5년(상법 제64조), 이자채권, 치료비채권, 공사대금채권, 근로기준법 상 각종 임금채권의 경우 3년(민법 제163조, 근로기준법 제49조)이며, 위 원고의 경우와 같이 판결에 의하여 확정된 채권의 경우 10년(민법 제165조)입니다. 이를 명심하지 않고 사정이 나아지면 변제하겠지 하는 생각에 채무자만 믿고 있다가 권리를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소멸시효를 중단시킬 필요가 있는데, 우리 민법이 규정하는 소멸시효의 중단사유로는 청구, 압류 또는 가압류, 가처분, 승인이 있습니다(민법 제168조). 다시 말해 내가 상대방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 확실하고, 상대방으로부터 돈을 갚겠다는 내용의 차용증을 받아두었다고 하더라도 차용증만 믿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소송을 제기하거나 상대방의 재산에 가압류를 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를 꾀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더러 좋은 마음으로 권리 행사를 미루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하지 않으므로, 상대방을 기다려주려는 마음과 권리 불행사 사이의 간격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을 꼭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wcms_writer_article}

피플 & 피플

이코노미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