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강원도 클래식 음악가 열전] 정치적 이념에 ‘월북’ 선택한 비운의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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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작곡가 이건우

삼척서 빈농 아들로 출생
음악재능에 춘천·日 유학
...
바이올린 통해 영감 얻어
사상적 몰두 짧은 전성기

이건우

이영진 음악평론가

다수의 사람에게 아주 생소한 이건우(李健雨·1917~1998년·사진)라는 인물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음악 유학을 다녀온 강원도 출신의 촉망받던 작곡가였다. 앞서 소개한 홍천 출신 하대응 작곡가의 뒤를 이어 일본 유학을 갔지만, 휘문고를 나와 유학을 간 하대응과는 달리 이건우는 춘천고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했다는 점에서 배경의 차이가 있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장 권진규(1922~1973년)보다 몇 해 앞서 일본에 유학한 이건우는 당시 또래의 작곡가 윤이상(1917~1995년)이나 나운영(1922~1993년)보다 훨씬 이름을 날렸던 작곡가였다.

하지만 정치적 이념에 매몰돼 6·25전쟁 초기에 스스로 북한으로 건너가 정착한 작곡가였기에 우리에게 생소한 인물로 다가설 수밖에 없었다. 바로 ‘월북 음악가’라는 블랙 리스트 때문이었다.

1917년생인 이건우는 당시 삼척군 원덕면 호산리(현 삼척시 원덕읍)에서 태어났다. 가까운 친척이 삼척 읍내에서 양조장을 경영했던 것에 비해 이건우의 아버지는 넉넉지 않은 수준의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이건우는 보통학교를 남들보다 늦은 9살에 입학하게 된다. 그때가 1927년의 일이다.

그런데 어떤 사료에는 이건우의 출생이 1919년생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를테면 덕흥보통학교(현 호산초) ‘졸업증서대장’에는 1917년 6월생으로 표기돼 있고, 춘천고등보통학교(현 춘천고) 학적부에는 1919년 8월생으로 표기돼 있음을 이건우 연구에 천착했던 음악학자 노동은 교수가 밝힌 바 있다. 아무튼 이건우는 당시 덕흥보통학교를 마치고 1933년 4월, 삼척에서 276㎞나 떨어진 춘천고보에 입학한다.

강원도 동해안에 있는 읍 소재지 가운데 최남단에 있는 원덕읍은 행정 편의상 경상북도 울진군이 더 가까운 곳이고, 도청 소재지도 강원도청보다 경상북도청이 훨씬 가까운 위치에 있는 곳이다. 지리적으로 춘천보다 오히려 안동이나 대구가 가까웠음에도 이건우가 굳이 당시 관립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선택한 이유를 밝혀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다만 그의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시절 전 교과목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성적은 창가(唱歌)였고, 춘천고보 입학 무렵부터 이건우는 장래 희망을 ‘상급학교(대학) 진학’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강원도청 소재지의 교육 수준과 문화적 환경 등을 염두에 두고 춘천으로 유학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런데 그의 상급학교 진학이라는 목표에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 중요한 인물이 바로 춘천고보 재학 시절 만난 음악 교유(敎諭·우리식으로 교사) 후이지 슌지(藤井俊治)다. 훗날 이건우 스스로도 ‘시간·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정열을 다했다’고 그 일본인 선생을 회상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후이지 슌지 선생으로부터 지도받은 바이올린은 나중에 그의 작곡 모티브에 중요한 단서를 가져다주는 악기가 됐다.

공교롭게 강원도 최초의 일본 음악유학생 하대응 선생과 이건우 작곡가의 음악행로가 상당 부분 유사하다는 점에서 필자도 놀란다. 농사짓는 아버지를 둔 환경이나 보통학교를 마치고 고등보통학교를 서울과 춘천으로 유학한 일, 게다가 바이올린을 통해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는 점, 그리고 더 높은 음악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강원도 출신의 두 청년 하대응과 이건우. 그러나 그는 하대응 선생과는 달리 주체할 수 없는 음악 에너지를 이데올로기에 너무 불태운 탓에 순수한 창작혼을 일찍 소진한 비운의 작곡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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